2008년 06월 24일
2008, 광장의 희망.
창발의 매력 - 범재들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비범함
미립자들이 합쳐져 원자를 이룬다. 예를 들어 수소 원자는 미립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미립자들 각각에는 수소라는 원소의 특성이 들어 있지 않다. 수소가 산소를 만나면 물이 된다. 물은 분명히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물의 속성은 수소에도 산소에도 들어 있지 않다. 인간의 지성은 뉴런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뉴런들 각각에는 지성이 들어 있지 않다.
이런 현상을 철학과 체계이론, 자연과학에서는 '창발'(emergence)이라 부른다. 창발이란 단순한 요소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어떤 새로움이 급작스럽게 출현하는 것을 말한다. 창발이 일어나면, 전체는 부분들의 산술총합을 뛰어넘는 특성을 갖게 된다. 무기물이 복잡한 구조를 가진 생명체로 진화해 온 것도 창발의 결과다.
창발은 생명체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가령 인터넷의 진화는 어느 한 천재의 디자인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개개의 사이트가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사이트들 사이에 링크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전체를 디자인하는 사람이 없어도, 인터넷은 스스로 알아서 점점 더 높은 차원으로, 그리하여 오늘날 web 2.0의 다중지성으로 진화해 왔다.
옛 사람들은 무기물에서 생명이 나온 것이 '신'이라는 지성적 존재의 디자인이라 믿었다. 하지만 창발은 초월적 디자이너의 천재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평범한 요소들의 상호작용만으로 새로움을 출현시키기 때문이다. 비범함을 만드는 데에 굳이 비범함이 필요 없다는 것. 여기에 창발의 매력이 있다.
조직의 창의성을 높이는 것은 천재들의 머릿수를 확보하는 문제가 아니다. 조직 자체를 창발에 적합한 시스템으로 바꿀 때, 사회는 천재에 의존하지 않고도 창의적일 수 있다.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게 아니다. 천재 역시 10만 범재들의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그것의 효과로 태어나는 것이다.
떼를 지어 날며 시시각각 하늘에 황홀한 그림을 그리는 새들을 생각해 보라. 이 그림에는 작가가 없다. 새들은 지도자의 명령 없이 그저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장애물을 피하라"는 원리에 따라 날아다닐 뿐이다. 그런데도 그것만으로도 예측할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한다. 이를 매스게임의 그림과 비교해 보라.
- <지도자의 명령없이도 황홀한 그림 그리는 새떼를 보라/매스게임의 문화> / 진중권의 상상
"소속감을 기르기 위한" 삼성그룹의 신입사원 매스게임.
"한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살린다"다는 삼성그룹의 기업철학.
그리고 한무리의 새떼들이 펼쳐보이는 장엄한 그림.
작년 진중권의 이 글은 '2008, 광장의 희망'을 예견이라도 하는 듯하다. 한조각 희망을 엿보았던 그 광장의 '희망의 원리'를 궤뚫는다.
"한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삼성의 기업철학, 인간관은 이미 우리사회의 그것이 되버렸다. 그리고 그 한명의 천재를 위해 천재와 범재를 분리하는 '수월성교육'이 공교육의 전체를 지배하고, 그 한명의 천재가 디자인한 세계를 일사분란하게 실행하는 매스게임의 사회. 과연 10만명으로부터 '분리/격리/보호'되어 교육된 그 '천재'가 디자인한 세계는 10만명에게 어떤 세상일까. 단지 먹여살려줬으니까 그만일까. 통제되고 관리되어진 매스게임의 한 픽셀들이 구현(실행)해낸 전체를 보며 열광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역시 천재의 디자인이야! 저 속에 나도 있어! 라며. 그러다 픽셀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지시가 없고 전체는 엉망이 되자, 새로운 천재의 구원을 기다린다. 우리를 인도해주소소!
하지만 2008, 광장의 그 픽셀들은 세계를 디자인하려는 그 '천재'에게 "싫어! 내말좀 들어!"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아니! 이럴수가' 여지껏 '역사!'를 이끌며 새로운 세계를 디자인하고 있었던 진보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누가 모았어?' 두리번거려본다. '아니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한무리의 새떼들이 펼쳐보이는 장엄한 그림을 목도했다.
광장의 희망은 여기까지였다.
민중의 머리위에서 '역사!'를 '디자인!' '만!'하던 노무현의 부활을 기원하는 또다른 '천재의 구원'은 2008, 광장의 '희망의 원리'를 깨닫지 못한다. '전설'과 '신화'가 '경계를 넘는 창발'을 가로막는다.
........
2008, 광장의 희망을 만들어냈던 청소년들이 그 희망을 키워주기를 기도해 본다.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차별하지 마세요", "시험하지 마세요", "나누지 마세요"....
"어른들이 무슨 잘못이냐, 청소년들이 지켜주자"라던 그/그녀들에게 무릎끓고 빌어 본다.
제발 지켜주세요.
- 지식채널e 362 1968(68혁명) 1부 주동자가 없는 시위
- 지식채널e 369 1968(68혁명) 2부 실패한 혁명
# by | 2008/06/24 04:52 | 나지막하게, 세계 그리고 꿈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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