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2월 02일
가출일기 / 주문진
망령의 기척이 다가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길을 떠났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의 공간, 가장 안락하게 편하게 행복하게 쉴 수 있는 곳에
상처가 아물려할때마다 엄습해오는 망령들. 난 결코 감당할 수 없다. 이제 그만 떠날때. 라 마음먹고...
1.
겨울바다. 몇해전부터 마음속으로 노래불렀던 겨울바다를 보러 갔다.
왜 주문진일까? 왜일까... 사람냄새나는 겨울바다. 그래서일지도.
언젠가 아주 오래전 집나온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간 곳. 그때도 왜 주문진이었을까?
달랑 돌아올 차비밖에 없어서 "경찰서에서 잘까?" "독서실에서 자자" 그렇게 독서실을 여관삼아 하룻밤을 지냈던 기억이 있던 곳이어서일까.. 그때가 20년전... 놀랍다 20년전이라니.
2.
빨간 등대에 가득히 남겨둔 사랑과 우정과 기원의 낙서들을 보며 문득, 지구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멸종시키려 머언 우주에서 온 'SIN'에게 "보세요. 이게 인간의 마음이에요. 한번만 봐주세요" 라는 장면을 그려 본다.
낙서, 그 마음 그대로 그들 모두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3.
주문진에서 정동진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바다를 옆에 둔 해안도로를 걸었던 기억은. 아주 오래도록 행복하고 따뜻했던 기억이 되었다. 그땐 부산 어디쯤에서 구룡포 등대쯤까지 걸었는데. 여름이었다. '봐 봐 나 살아있어'라며 애교부리는 아이마냥 파란하늘 파란바다 가쁜 숨, 땀, 바람, 길 그리고 자유가 함께 생명의 기운을 발산했던 기억의 한 조각. 어둡고 음산한 기운이 감싸올때 자주 써먹게 되는 나의 무기가 되어줬다.
이번엔... 망령으로부터의 피난이어서일까. 그때만큼의 싱싱한 생기는 받질 못했다.
어디쯤일까. 주문진에서 영진을 지날때쯤일까. 바다를 바라본 아파트를 지날때이다. 내가 만일 지금의 나로 20년전 최루탄 매캐한 거리 옆 작은 골목길로 들어가 지금 저 아파트를 봤다면... '나 저기서 살꺼야' 그렇게 한편의 쿨한 인생도전기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 소소한 행복의 조각을 업신여기지 않으면서. 물론 '지금의 나'이기에 '나 저기서 살꺼야'라는 도전이 무섭지도 각박하지도 않은 느낌이 가능할거라고도 생각해 본다. 어쨋든. 정말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 는 생각이 샘솟았다.
4.
영진에서 벌써 앉을자리를 찾다. 정동진까지 어느정도일까 가늠해보려 동네 슈퍼 할아버지에게 묻다. 참 친절도 하다. 군발이 냄새가 나지 않는 군인 출신(혹은 군대라는 경험이 전 일생을 관통해버린 하지만 '내가 옛날 월남에서말야~'로 시작하지 않는) 인듯.. 정동진까지 50분 행군 5km로 4-5시간 걸어가야 한단다. 5km라는 거리가 어느정도인지 내가 알리없다. 반나절 걸으면될까. 어쨋든 가보기로 했다.
5.
연곡을 지나 사천을 지나다. 더이상 못간다. 무리다. 조금만 더 가면 경포인데... 그렇군 정동진까지는 불가능이구나. 그제서야 깨닫다. 언제나처럼 몸으로 겪어서야 알게되는 식. 발바닥은 물집이 생기고 또 터졌다. 절룩거리며 지나가는 버스를 탈까 ... 조금만 더 걸어 경포까지 갈까... 그때 버스가 지나간다. 한치의 주저도 없이 버스잡아 타다. 바로 코앞이 경포였는데. 아쉽다.
6.
기진맥진. 모텔잡다. 삼만원. 따뜻하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멍하니 있다. 물의 압력때문일까 수증기때문일까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고 보니 욕조에 몸담그는 게 일본 애니의 장면들처럼 썩 포근하진 않다는 걸 알았다. 음.. 환기안되는 수증기때문이었을까. 다음에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여행의 또 다른 유혹은 이런 사치를 만끽해 보는 것이다. 빠져들것만 같은 안락함.
내일은 어디로 갈까. 정동진? 눈이 감겨오자 또다시 망령들이 급습해온다. 싫다. 싫다.
# by | 2009/02/02 03:03 | 여린 일상 그리고 삶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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